정동화

참여 작품

경계인
1933년, 19살의 정율성은 홀어머니를 두고 중국행 여객선에 몸을 싣는다. 조선 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전화도청임무를 수행하며 러시아인 음악가 크리노와 교수에게 음악을 배운다. 하지만 정율성은 광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지만 다섯형제 모두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기에 조국이 해방되기 전까지는 고향 광주로 돌아갈 수 없었다. 1936년, 중국 남경 대학살 사건으로 중국공산당과 조선독립군의 항일의지는 더욱 불타오르고, 일본을 등에 업은 중국 국민당은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을 강하게 압박한다. 당시 정율성과 많은 독립투사들은 항일투쟁 방법에 많은 고민을 하였고, 일부는 국민당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고 일부는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활동하였다. 정율성은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 혁명에 동참하였고, 아나키스트 김산과 많은 동지들은 중국 혁명이 성공이 조선 혁명의 성공으로, 조국 해방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으며 항일 전선에서 싸웠다. 하지만 미군정하의 해방된 조국은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혀 공산당 활동을 한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에 서 있다.